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준 황후 (문단 편집) === 제2차 세계 대전 ===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도 [[일본 황실]]은 끝내 피난하지 않았는데''', 이는 황실의 가장 큰 어른인 사다코 태후가 피난을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가코 황후도 남편 쇼와 덴노와 함께 도쿄에 머무르며, 걱정이 많은 남편을 내조했다. 전쟁으로 식량 사정이 좋지 않던 시절, 쇼와 덴노와 나가코 황후는 식사할 때면 서로 의논하여 [[요리]] 한두 접시를 남겨 시종들에게 하사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음식이 귀했던 전근대 시절에도 이런 전통이 있었다. 예를 들어 조선의 경우 왕은 아무리 대식가라도 완식하기 어려운 양의 9첩 반상을 매 끼니마다 먹었지만 다 먹는 경우는 드물었고 대개 조금만 먹은 뒤 상을 물렸다. 그리고 남은 음식은 궁녀나 환관 등 아랫사람들이 나눠서 먹는 일이 일반적이었다.] 전쟁 말기에 나가코 황후는 [[채소]] 재배와 양계를 했고, 패전 후에는 철수하는 [[일본군]]들을 위해 이부자리와 옷가지를 만들었다. 한편 맏이 [[데루노미야 시게코]] 공주는 전쟁 중이던 1943년에 방계 황족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의 장남인 [[히가시쿠니 모리히로|모리히로 왕]]에게 시집갔고, [[도쿄 대공습]]이 한창이던 1945년 3월에 방공호 안에서 첫째(장남) 노부히코(信彦) 왕을 낳았다. 이로서 나가코 황후는 외할머니가 되었다. 시게코 공주는 방계 황족에게 시집갔기 때문에 결혼 후로도 황족 신분을 유지했지만, 1947년의 신적강하로 인해 평민으로 강등되었다. [[국가신토|신격화]]되어 왔던 일본 황실은 패전 후 '''[[인간선언]]'''을 하였고, 적극적으로 국민들을 가까이 하며 '''각종 활동'''을 활발하게 벌였다. 나가코 황후도 1947년 [[일본]] [[적십자]] 명예 총재 취임을 시작으로 1952년 이후의 전국 전몰자 추도식, [[1964 도쿄 올림픽]] 개회식, 1970년 일본만국박람회 개회식, [[1972 삿포로 동계올림픽]] 개회식 및 [[오키나와]] 복귀 기념식전 등에 출석했다. [[야스쿠니 신사]]와 고코쿠 신사 등에도 참배하였다.[* 단, 이때는 '''A급 [[전범]]'''들이 합사되기 전이라, 지금 정도로 [[뜨거운 감자]]가 되지는 않은 상황이었다. 나중에 A급 전범들이 합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쇼와 덴노는 격노하여, 다시는 야스쿠니 신사를 찾지 않았다. 당시엔 전쟁이 끝난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일본]]은 여전히 전범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고, --지금도-- [[미국]]의 영향력이 막강했다. 헌데 그 미국을 공격하고 [[아시아]]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 A급 전범들을 옹호했다가는, [[유엔]] 헌장 53조와 107조에 의거하여 미국이 일본을 재차 공격하여 없애버렸을지도 모른다. A급 전범 합사 이후 처음으로 참배했던 [[나카소네 야스히로]]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일본 총리]]는 1985년 패전 40주년 기념으로 아무 생각 없이(…) 야스쿠니 신사에 갔다가, [[아시아]] 전체가 격노하는 상황에 매우 기겁하였다. 그 후로 그는 다시는 야스쿠니 신사에 가지 않았고, 각료들에게도 "야스쿠니 신사에 가려거든 반드시 개인 자격으로만 가라."고 엄명을 내릴 정도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